김순영 화가의 '한국의 소나무' ' 대작 작품전 개최(조선일보 미술관)- 신촌 전광판 홍보영상 추가

소나무 작가 김순영의 <歲寒雪松>대작 미술평론(신항섭 평론가)

조영관 기자 | 입력 : 2019/08/31 [19:59]

        '소나무' 대작 작품전 개최전 홍보 영상이  신촌오거리 전광판에 전시기간까지 홍보

▲ 소나무 작가 김순영의 <歲寒雪松>대작 중 일부 그림     © 챌린지뉴스

   

 

김순영 화가가 지금 혼신을 다해 그리고 있는 역대급 소나무 그림은 오는 925일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개막하는 그의 32번째 개인전에서 볼 수 있다.
유명한 신항섭 미술평론가의 작품평을  원본 그대로 게재한다.

     

화가에게 소재주의는 어떤 의미일까. 우선 긍정적인 면에서 볼 때 한 가지 소재에만 천착함으로써 기술적인 완성도가 높아지고 심상이 명확해지게 된다. 더불어 특정소재에 전념하는 작가의 경우 그 소재는 곧 특정작가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효과가 있다. 다시 말해 특정소재는 특정 화가를 연상하게 만든다. 반면에 특정소재에 집착하게 되면 자칫 매너리즘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눈과 손에 익숙해짐으로써 타성적인 태도로 일관하게 될 수 있다. 따라서 소재주의를 따르는 화가의 경우 부단히 새로운 조형적인 해석 및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김순영은 지난 20여 년간 소나무를 소재로 하여 작업해왔다. 그러고 보면 그는 소재주의 화가인 셈이다. 초기에는 눈에 보이는 풍경 속의 소나무를 그대로 재현하는데 집중했다. 소나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형태적인 아름다움에 이끌려 그 외형묘사에 치중했다. 그러다가 묘사력에 자신감이 붙고 심상이 확고해지면서 차츰 소나무가 자리하는 곳의 정서에 눈을 뜨게 됐다. 대기감과 자연현상에 따른 신비스러운 주변상황에 시선을 주면서 정서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게 된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눈에 보이는 소나무라는 사실성을 벗어나서 임의적인 표현과 구도 및 구성에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무려 9m에 달하는 대작을 시작하게 되었고, 수묵화처럼 검정색 물감만의 단색화에 매료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소나무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심상 속의 형태미를 좇는 상황이다. 구태여 실제의 소나무를 모델로 하지 않아도 능히 심상으로 조합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즈음부터 그의 소나무는 사실적인 형태미를 견지하면서도 관념적이 된다. 스토리를 만들고 거기에 합당한 이미지의 소나무를 배치하고 배열하는 방식으로 작업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이르자 그는 무언가 의미 있는 작업, 즉 기념비적인 작업을 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9.2m×2.7m에 달하는 초대작 <세한설송 歲寒雪松>을 시작하게 된다. 이는 애초에 꿈으로만 끝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처럼 큰 캔버스를 펼쳐놓고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20평이 채 안 되는 화실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인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꿈을 현실로 바꾸어놓았다. 화실 중간 기둥에다 기존의 200호 크기의 작품 3점을 연결하여 막아놓고 그 위에 캔버스를 부착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옆면이 좁아 양쪽에서 캔버스를 말아놓고 중간부분에서 그려나가기 시작하여 점차 양쪽으로 확장해가는 방식인데, 이 광경을 보면 할 말을 잃게 된다. 높이가 2.7m에 이르니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작업을 한다. 하지만 더욱 기가 찬 일은 시거리가 없다는 점이다. 캔버스를 앞에 두고 뒤로 물러서봐야 2m도 안 되니 화면이 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다행히 바닥에 놓고 스케치를 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도저히 작업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는 이 대작에 앞서 4점의 9m에 달하는 작품을 제작한 경험이 있어 이를 믿고 무모한 도전을 했는지 모른다. 그처럼 어려운 여건에서도 작업을 해냈다. 그는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작품의 크기로 회자되는데 만족치 않을 무언가 의미를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그림 소재를 찾아다니면서 만났던 다양한 형태의 소나무들을 한 자리에 모아보면 어떨까싶은 생각에 미쳤다. 9m에 달하는 한 폭의 화면에 소나무의 사계절을 담았던 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거기에서 큰 의미는 찾을 수 없었다.

궁리한 끝에 소나무를 찾아 팔도를 주유할 때 감동받았던 소나무들을 한 곳에 모으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싶었다. 그리하여 맨 처음 선택한 소나무는 울진의 <대왕송>및 인근 소나무들이었다. <대왕소나무>는 줄기가 붉은 색을 띈, 지름 1.2m에 수령이 600여년으로 추정되는 거목이다. 경북 울진군 서면 소광리 산11에 위치하고 있는데, 근래 보호수로 지정될 만큼 크기나 수령에서 그리고 위용에서 뛰어나다. 북쪽 면의 가지가 세월과 풍상에 많이 훼손되어 본래의 모양을 잃었으나 붉은 색으로 두른 소나무의 위풍당당한 자태에서는 그야말로 대왕의 기개와 품위가 느껴진다.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산67-1에 소재한 청령포에는 600여년으로 추정되는 천연기념물 제349호인 <청령포 관음송>이 있다. 이 소나무는 크기가 무려 30미터에 이르고 어른의 가슴높이에서 둘레가 5m의 노거수이다. 여기에 함께 하는 소나무들 가운데 크기로는 으뜸이다. 아랫부분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는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고[],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뜻에서 관음송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지리산 <천년송>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전북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에 위치한 <천년송>은 천연기념물 제424호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수령이 오래고 그 모양새가 둥근 산봉우리를 닮은 데다 가지들도 비교적 정연하여 수려하다. 어른 가슴높이에서 둘레가 6m에 이르고 높이도 20m에 달하는 거수목이다. 마을의 수호신으로서 매년 정월 초사흘에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선지 신령스러운 기운이 감돈다.

제주도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소나무가 그리 많지 않은데 천연기념물 제160호로 지정된 대흥사 소유의 <제주 산천단 곰솔 군>이 유명하다. 곰솔은 해송이라고도 불리며 껍질이 검은색을 띄고 있어 흑송이라고도 불린다. 여덟 그루 가운데 아랫부분에서 갈라진 소나무를 선택했는데, 높이가 30m에 가슴높이 둘레가 5m의 거송으로 수령이 600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 나무는 아랫부분이 많이 상했으나 지난해 보수를 해서 제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여기에다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상판리 241의 속리산 입구 쪽 길 한가운데 의연히 서 있는 <보은속리 정이품송>은 천연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었을 만큼 널리 알려져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근래 나뭇가지 상당 부분이 잘라지는 아픔을 겪었으나, 나머지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단아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어 과연 벼슬자리를 받은 소나무답다는 찬사를 받는다. 둘레가 4.5m이고 높이가 15m에 달하는 노거수인데 수령은 600년 정도로 추정한다.

위에서 열거한 다섯 군데, 즉 경북의 <대왕송>, 강원도의 <청령포 관음송>, 전남의 <천년송>, 제주도의 <산천단 곰솔 군>, 충북의 <정이품송>이 오른쪽으로부터 차례로 배치되었다. 그러고 보니 전국에서 유명한 소나무를 두루 선택했는데 아쉽게도 서울 경기지역 소나무가 빠진 셈이 되었다. 그래서 맨 나중에 서울의 상징인 남산의 <소나무 힐링숲>을 추가했다. 비록 위에 열거한 소나무들에 비견될 만한 노거수는 아닐지언정 숨겨진 명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어쩌면 완상의 대상이 아니라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숲길로서의 친숙함과 일상성은 또 다른 의미의 소나무가 지닌 가치일 터이다.

아무튼 유명한 노거수들을 하나의 화면에 불러들여 나열하고 보니 대서사시를 보는 듯 장엄하기 그지없다. 단순히 화면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수령 500년 이상의 나무들이 발산하는 신령스러운 기운이 화면을 가득 채우면서 역사적인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있기에 그렇다. 모든 생물은 수명이 오래 될수록 삭고 닳고 메마르게 되면서 그 형세가 괴기스러워진다. 괴기스러움은 오랜 풍상이 만들어낸 세월의 흔적이자 엄숙한 삶의 징표이다.

▲ 소나무 작가 김순영의 <歲寒雪松>대작 앞에서    © 챌린지뉴스

 

나무는 다른 생물들과 달리 그 종류가 무엇이든 간에 수백 년의 세월이 덧쌓이면서 더욱 아름다워진다. 작은 나무들이 따를 수 없는 기세 및 위엄과 더불어 형언키 어려운 영적인 분위기가 감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오래 묵은 나무는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의 짧은 생애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당당함과 엄숙함이 있어 그 앞에 서면 숙연해지기 십상이다. 그가 캔버스에 불러들인 소나무들도 저마다 다른 지역, 다른 환경에서 생장하였지만 어김없이 신령스러운 기운을 두르고 있다. 아마도 자연 그대로인 상태여도 그렇겠지만 사람들이 숭엄한 존재로 받아들임으로써 또 다른 존재로서의 영적인 기운이 감돌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는 이번 작품을 단순히 유명세를 타는 소나무들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500-600년을 살아온 노거수들이 뿜어내는 아우라를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물론 시각적으로 인지되는 것은 아닐지언정 그가 마주하면서 느꼈던 감동과 알 수 없는 어떤 기운을 그림 속에 투사시키겠다는 의지를 앞세웠다. 다시 말해 수많은 풍상을 겪으면서도 그 기세가 꺾이지 않고 의연한 자태를 잃지 않지 않는 노거수를 통해 생명의 경이로움을 표현하고 싶었으리라.

또한 십장생의 하나인 학을 배치하여 노송에 구현되고 있는 장생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한편 공간적인 깊이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여기에 덧붙여 서로 다른 형태의 소나무가 하나의 소속감을 형성하는데 긴요한 구름 띠를 둘러 신비로운 기운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맡기고 있다. 단순히 소나무의 노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장수생물이 지닌 여러 가지 의미를 회화적인 이미지로 변환하여 노송의 고귀한 품격을 보여주고자 했다.

<세한설송>은 눈에 덮인 겨울 소나무다. 문인들은 세한삼우, 즉 소나무, 대나무, 매화는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강인한 의지와 생명력의 상징으로 삼았다. 특히 한 겨울에도 그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의 자태에서 기개와 절개를 보았다. 그가 눈에 덮인 소나무를 그리게 된 것도 이처럼 세상풍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한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는 속내를 드러내는 것인지 모른다. 엄동설한에도 흔들림 없이 아름다운 자태를 잃지 않는 의연함이야말로 그가 <세한설송>에서 가장 부각시키고 싶었던 점이 아니었을까.

각각의 소나무가 지닌 강인한 생명력과 더불어 저마다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 터여서 한 자리에 모아놓고 보니, 이후 소나무 그림에서 과연 이를 능가할 수 있는 작품이 또 나올 수 있을까싶을 만큼 구성이 아름답다. 무엇보다도 현실적인 느낌을 살리는 가운데 영적인 기운이 넘치는 공간적인 깊이를 표현함으로써 단순히 나무들의 이미지에 그치지 않는 신비스러움이 느껴진다.

사실적인 묘사력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수백 년간의 풍상을 겪어온 노송들은 저마다 범접하기 어려운 아우라를 발산하고 있다. 시선을 압도하는 노거수에서 느끼는 그 위압감과 장쾌함과 더불어 1,000호에 달하는 대형 캔버스가 주는 시각적인 압박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크기가 주는 시각적인 쾌감이 무엇인지를 체감할 수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이 지닌 또 다른 성과일 터이다. 가지마다 순백의 눈을 얹고 차가운 공기에도 개의치 않고 무심한 듯 서 있는 노송들의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늙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깨닫게 되는 것도 <세한설송>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설득력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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